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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아연 소년들

by 다오파더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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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동안의 인터뷰로 끈기있게 써내려간 목소리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이 마주한 책이다. 그래서 처음엔 그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비극을 그린 소설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책을 홍보하는 문구 중 하나인 '알렉시예비치를 재판정에 서게 한 문제작, 그리고 전 세계의 독자들이 무죄를 선고한 걸작!' 이라는 문장은 사회적으로 굉장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대단한 문제작 처럼 보이기 위한 과장된 홍보 문구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생각보다 심오하고 끔찍하며 많은 감정이 드는 책이라고 느꼈다.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로 2015년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작가 자신이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독특한 장르로 유명하다. 목소리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는 수년 동안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 이야기들을 인터뷰의 질문과 답변이 아닌 이야기처럼 써내려가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연 소년들>은 작가가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가 기록되어 있으며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라는 질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모두가 외면하는 진실, 서둘러 희미해지고자 하는 진실을 끈기있게 써내려간다. 이러한 부분들 때문에 러시아의 마음대로 되고 있지 않는 전쟁, 동원령 선포로 전 세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 전쟁의 공허한 속살과 마음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생생한 절규들, 그리고 그것들이 주는 메시지가 더 강력히 와닿는다.

 

왜 아연 소년들인가? 

제목인 <아연 소년들>은 전쟁터에서 죽은 젊은 소년들의 시신이 담긴 관을 의미한다. 왜 아연관인가 해서 찾아봤더니 타국에서 죽은 시신을 고국으로 전하기 위해 적절한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장을 위한 관이 아닌 운반을 위한 관. 매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시신의 운반에 쓰일 수도 있다. 

 

조국을 위한 의무, 전쟁 영웅들이 세운 위업의 재건 등의 선동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명분없는 전쟁터에 보내졌다. 설령 본인의 의지를 정답이라 여기고 참전했다 하더라도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터의 질문들 앞에 숨이 막힐 뿐이다.

 

전투와 승리와 죽음은 결코 영웅적이거나 낭만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입대하자마자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선임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물론 조롱과 폭행은 일상이다. 보급품이 제 때 전해지는 것은 당연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내가 왜 그들을 죽여야 하는지 명분은 없다. 전쟁터에서의 살인행위는 윤리적 갈등과 죄책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만 하는 감정들을 그냥 지나치게 만든다. 전쟁터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들은 이전 세계와 아예 단절되었으며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겨우 그 길을 발견하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당신 다리는 왜 없는거에요? 네? 전쟁이라고요? 진짜요? 거길 왜 간거죠? 누가 가라고 했어요?... 안됐지만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요" 운 좋게 전장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상처는 지울 수 없다. 잘려나간 다리는 평생 붙이지 못하는 것처럼 잘린 마음도 마찬가지다. 소련 정부 역시 그들을 철저히 외면한다.

 

내 친구들이 죽어 무덤 속에 있어요. 자기들이 이 비열한 전쟁에 속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요. 가끔은 그 친구들이 부럽기도 해요. 그 친구들은 영원히 이 사실을 모를테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속을 일도 없고요. 

오히려 지금 더 선명하게 유효한 질문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이 책으로 인해 고소를 당한 작가의 재판 기록이 쓰여 있다. 아프간 참전 군인들과 유가족 어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고소인들은 이 작품이 문자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편의적으로 취했으며 이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주징했다. 작가는 이 소설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법원에 문학전문가의 감정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두 번 모두 묵살당했다.

 

저는 이 시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쓰고 녹음합니다. 살아 있는 목소리들, 살아있는 운명들을요. 역사가 되기 전의 목소리와 운명은 아직 누군가의 고통이고, 누군가의 비명이고, 누군가의 희생이거나 범죄입니다. (재판에서 작가의 진술)


전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에게 그 모든 것은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 모습과 깊이는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만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재판에서 모두에게 던진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더욱 선명하게 유효한 것 같다.

 

누가 죄인인가? 대체 이 영원한 질문을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나, 그들. 문제는 다른 곳에, 즉 우리들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택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쏠 것인가 쏘지 않을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침묵하지 않을 것인가?'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재판에서 작가의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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